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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 Fabian Oefner, <Millefiori>, 2012 | <Millefiori>, 2012 | <Corona>, 2016 | <Oil Spill>, 2016 | <Orchid>, 2013
출처: http://fabianoefner.com
이 사진들을 보고 당신은 무엇이라 생각하겠는가. 위의 사진들은 스위스의 사진 예술가 파비안 오프너(Fabian Oefner)의 밀피오리(Millefiori), 코로나(Corona), 오키드(Orchid), 오일스필(Oil Spill) 프로젝트의 일부 이미지들이다. 액체자석(ferrofluid), 훈색(iridescence), 사운드웨이브, 자기장, 원심력, 압축 효과 등을 이용한 과학현상을 환각적인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프로젝트를 이어오면서, 작가는 우리와 늘 함께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과학이 얼마큼 아름다울 수 있는 보여주고자 한다. 그가 작업을 하는 방식은 드리핑 기법을 이용하는 미국 추상미술의 대가 잭슨 폴록(Jackson Polock)과 스카치위스키 등 과학적이지 않다고 여겨지는 영역에서 영감을 받는다. 하지만 그의 작업들은 철저히 계산된 과학을 기반으로 한다. 그렇기에 과학을 예술로 탈바꿈하는 아티스트로 불리고 있다. 과학적으로 현상을 분석하고 물질을 연구하는 그를 과학자로 불러야 할까 예술가로 불러야 할까. 왜 과학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기 위해 예술의 이름을 가져왔을까.

이러한 질문을 바탕으로 본 글에서는 예술과 과학이 융합을 이루게 된 배경과 두 영역의 조화를 시도한 작품들을 살펴보고, 오늘날 미술에 대한 논의에서 이러한 시도가 갖는 의미를 찾아보려 한다.
예술과 과학의 대립과 융합: 역사의 산물
현대 과학과 미술은 그 속도를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새로운 것을 내어놓느라 분주하다. 근대 사회에서 과학과 예술을 대립된 분야로 규정짓고 독자적인 영역을 개념적으로 구축한 반면에, 현대 탈분화 시대에서는 과학과 예술의 융합이 도리어 주목받고 있다. 과학적 방법을 끌어들이는 예술, 과학에서의 윤리의 척도와 진리를 성찰하는 예술, 예술이 던지는 질문에 답하는 과학, 예술이 주는 카타르시스를 분석하고 연구하는 과학 등을 통해 장르의 융합을 꾀하고 있다. 과학의 영역에서 보자면, 비언어적 사고의 중요성이 대두되고 있는 엔지니어링과 과학 사학 등 다양한 분야들 간의 상호 교류에서 실용성에 바탕을 둔 디자인과 예술의 창조적인 접근은 그 본질이 되는 핵심을 구성하는 요소가 되고 있다.
Marcel Duchamp, <Fountain>, 1917
반면, 첨단 과학 기술은 예술에 새로운 소재와 기법을 제공하는 근간이 되어 실제로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 포스트모던 미술의 장을 연 다다이즘의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은 예술계의 부조리함을 풍자하는 방법으로 공장에서 찍어내는 변기를 예술화한 ‘샘(Fountain)’과 같은 레디메이드(ready-made) 오브제를 선보였고, 팝 아티스트 앤디 워홀(Andy Warhol)은 대량생산 체제와 시대상을 반영하는 방식으로 기계화된 예술을 표현 방식으로 택했으며,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이자 미디어 아트의 시대를 열었던 백남준은 실제로 “나는 기술을 증오하기 위해 기술을 사용한다.”라고 말했다.1)
브루넬레스키 원근법(Brunelleschi perspective)을 설명하는 도면
Samuel Y. Edgerton, <Brunelleschi's mirror, Alberti's window, and Galileo's 'perspective tube'>, 2006
출처: http://www.scielo.br/
과학과 예술이 융합한 것은 비단 현대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과학과 예술이 창조와 창의력을 근간으로 하는 활동이라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그 둘은 함께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르네상스 시대 천재 예술가이자 사상가, 과학자였던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는 건축, 해부학, 과학, 미술 등을 통합하여 <모나리자>, <최후의 만찬> 등의 시대의 걸작을 남겼으며, 그전에는 건축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는 유클리드 원근법을 발명하여 피렌체의 산타마리아 델피 오레 대성당의 돔을 짓는 등 시대의 대가들은 예술과 과학을 넘나드는 작품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예술과 과학이 언제나 친했던 것은 아니다. 예술과 과학 모두 시대에 반응하여 새로운 창조적인 제안을 하는 소통 방식으로 존재하고 발전해 온 듯 보이지만, 아직도 서로 다른 ‘두 영역’ (혹은 두 문화)이라고 여겨지는 바탕에는 예술과 과학 사이에 누적되어 온 역사가 깔려있다. 우선, 우리가 흔히 접하는 순수예술(fine art)라는 개념은 어떻게 생겨났는지 살짝 들여다보도록 하자.
과학은 예술과 같은 창조력과 직관력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이미지
Maria Popova, <Systematic Wonder: A Definition of Science That Accounts for Whimsy>, 2012
출처: https://www.brainpickings.org/
예술을 지칭하는 영어 단어 art(아트)는 라틴어 ars(아르스)에서 생겨났고 ars는 그리스어 techne(테크네)에서 유래한 말이다. 흥미로운 점은 현재의 과학기술, 기술, 기능 등을 뜻하는 technique(테크닉)과 technology(테크놀로지)는 techne에서 유래한 또 다른 두 단어들이다. 즉, art(예술)와 technique/ technology(기술, 과학기술)는 동일한 어원을 갖고 있는 것이다. 18-19세기까지 서구 문명은 예술을 일정한 과제를 해결해낼 수 있는 단순하게 숙련된 기술, 즉 테크네(techne)의 일부로 치부하였다. 18세기 말부터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가 대립하면서 예술가들은 정권을 미화하고 상징하는 예술 작품들을 선보였고, 예술가들을 교양인으로 상승시키기 위해 특권층들은 미술교육 기관을 설립하여 기술적이라 여겨왔던 활동들을 미의 개념에 관련시키는 이론화를 도모했다. 결국, 시, 음악, 회화, 조각, 건축 등 다섯 가지의 기술은 미를 공통의 목표로 그것을 모방하는 활동이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미와 기술을 결합하는 언어인 순수예술(fine-art: Beaux-arts)라는 말을 채택하였다. 언어로 그 틀을 규정짓고, 배척하고, 재생시키는 역사 속에서 과학과 그것을 생활에 적용하는 기술의 영역으로부터 예술이 예술로서 살아남기 위해 애써온 것이 아마도 근대 예술의 역사라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저명한 과학저술가 아서 밀러(Arthur Miller)는 과학과 예술이 창의성(creativity)에 공통된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은 인정하지만, 과학적 창의성과 예술의 그것에는 분명 차이점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즉, 예술가들은 작품 속에서 마음과 감성의 흐름을 표현하지만,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논문에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주장했다.2) 한 예로, 빈센트 반 고흐는 고뇌와 열정과 감성을 캔버스에 담아냈지만, 아인슈타인의 논문에서는 그의 감정을 전혀 느낄 수 없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과학사학자 피터 갤리슨(Peter Galison)에 의하면 19세기 초 주관성을 완전히 배제한 기계적 객관성(mechanical objectivity)이 과학을 인문학이나 예술학과 구별짓는 근간으로 여겨져, 과학은 주관성이 개입되지 않는 형태의 학문으로 굳어져 갔다.3)
현대미술에서의 과학과 예술의 융합
Lisa Park, <Eunoia II>, 2014 (대전시립미술관 ‘더 브레인(The Brain)’展 중에서)
출처 : http://www.thelisapark.com/
현대예술이 창의성을 바탕으로 (때로는 불편하고 낯선 방식을 통해) 습득된 지식과 고정관념, 그리고 사회 풍념에 대한 질문을 던져 새로운 세계관에 대한 정신적 자유와 기회를 준다면, 과학은 객관성을 가미하여 그 답을 찾을 수 있는 길을 보여준다. 두 영역은 공통의 근간인 창의력과 창조적인 접근, 그리고 시대와 소통하는 언어로서의 사회적 개념 확장을 도모한다. 2014년 ‘더 브레인’(위 사진) 전시와 함께 열린 ‘과학예술 콘퍼런스’ (대전시립미술관 주관)에서는 카이스트 대학의 뇌 연구 전문가들, 문화예술계 인사들과 정신분석학 전문가들이 과학과 예술의 만남을 주제로 예술이 과학 연구의 상관관계에 대한 담론을 펼쳤다. 과학과 예술을 담당하는 뇌의 부분은 다를지 모르나, 둘의 근간은 하나의 뇌이고 그 둘은 우리의 머릿속에서도 언제나 만나고 있다. 뇌 과학 연구는 감성과 정신을 확장시키는 예술의 본질이 인간 자체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것에 쓰이는 단적인 예이다. 뇌과학, 특히 신경 미학 분야에서 예술 감상이 뇌에 끼치는 영향은 상당히 복잡하다. 인간의 뇌가할 수 있는 일 중 하나는 원래 습득하거나 경험했던 것과 상상하는 것을 결합해서 이해하는 것이다. 콘퍼런스에 참여한 뇌 전문가들에 따르면, 예술 감상은 현재 보고 듣고 있는 것을 평가하고 예측하고 분석하면서, 상호 정보 교류를 위해 뇌의 전 영역이 고도로 활성화된다고 한다. 뇌의 일부분에 대한 연구보다는 뇌의 전 영역의 활성화 정도를 우선시하는 뇌 과학 분야에서 예술 그 자체가 가지는 의의는 상당하다고 여겨진다. 미술 작품을 볼 때 단순히 보이는 것만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를 하려고 애쓰는 과정에서 보고 싶은 걸 상상해서 무의식적으로 조화시키는 것이 그 예이다.4)

그렇다고 예술이 과학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역할만 하고 과학은 예술의 근간이 되어주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예술의 생과 사는 과학과 기술의 발달과 문화 변동에 의해 결정되어 왔기 때문이다. 단순히 보면, 예술 작품이 우리 눈앞에 있기 위해서는 연필이나 물감과 붓과 같은 도구의 발명이 있어야 했다. 19-20세기 초반 산업화 시대에는 인쇄술의 발달과 사진의 발명을 바탕으로, 포토몽타주나 인쇄식 이미지를 이용한 기법이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생산성과 기계성을 이용한 다다이즘과 팝아트 등의 실험적 예술이 등장하였다. 이후, 대중매체와 컴퓨터,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예술은 기술적 결합을 통해 개념과 기법의 확장을 도모하고 있다.
(좌) Jason Hackenwerth, < Pisces >, 2013
(우) Christo & Jeanne Claude, <Surrounded Islands>, 1980-83 | 대지미술의 한 예
출처: http://www.thisiscolossal.com/2013/03/jason-hackenwerth-pisces/ | http://christojeanneclaude.net
또한, 예술을 감상하기 위해 시간에 맞춰서 미술관이나 갤러리를 방문해야 했던 비효율적인 체계에 한계를 느낀 예술가들은 캔버스나 종이 위에 표현하는 방식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공간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과 재료와 도구에 대한 정교한 분석이 필요한 설치미술과 생태계를 손상시키지 않는 범위를 제한하면서도 자연과 조화를 추구하는 대지미술이 한 예(사진 오른쪽)이다. 위 사진에 보이는 설치작품(사진 왼쪽)은 뉴욕에서 활동하는 풍선 팝 아티스트 제이슨 마이클 하켄 워드 (Jason M. Hackenwerth)의 것으로 2013년 영국에서 열린 에든버러 국제 과학 페스티벌에 선보였다. 10,000개가 넘는 풍선을 불고 그것을 엮어 사진에 보이는 입체 조형물이 탄생하기까지 아티스트와 그의 조수, 그리고 페스티벌 스태프 여러 명은 수일을 밤을 지새워 설치와 수정을 거듭했다.
Marc Lee, <10.000 Moving Cities – Same but Different>, 2013 | 미디어 아트의 예
출처 : http://marclee.io/
뿐만 아니라, 디지털 체계의 효율성에도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에 따른 과학과 예술의 융합은 창조와 감상의 가능성을 무한대로 열어놓고 있다. 비디오 아트와 컴퓨터를 이용한 미디어 아트, 움직임의 과학을 접목한 키네틱 아트가 대표적인 예이다.
오픈갤러리 홈페이지 | 온라인 작품 전시/렌탈 판매의 예
출처 : http://www.opengallery.co.kr
아티스트들은 디지털 화집을 만들고, 홈페이지를 운영하며, 오픈된 온라인 전시를 열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유튜브(You Tube)와 같은 동영상 콘텐츠 공유 웹사이트를 통해 작품을 보이며 세상과 소통한다. 관객은 인터넷과 TV를 통해 원하는 시간에 예술작품을 감상하고, 예술가는 디지털 매체와 사이버 세상을 예술적 소재로 사용하면서 더욱 확장된 현실 개념을 말한다. 예술은 과학과 기술의 변화에 힘입어, 미술관이나 갤러리의 제한된 틀을 벗어난 완전히 다른 차원에서 존재하고 확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예술과 과학의 융합이 가지는 의의
앞서 파비안 오프너를 예술가로 불러야 할지 과학자로 불러야 할지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그는 과학적인 분석을 통해 1/1,000초에 수백 장의 사진을 찍어 최종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아서 밀러가 말했듯이 예술과 과학이 근간이 같음에도 불구하고 최종 결과물에 대한 주관성의 유무에 따라 다른 영역으로 분류된다고 생각하면, 오프너는 과학현상과 감성적 아름다움을 결합을 꾀한 과학적 예술가 정도로 여기면 되지 않을까 싶다.

한 배에서 나온 과학과 예술을 분리된 영역으로 나누기 위해 수백 년이라는 시간을 소모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억지로 떼어놓은 그 둘을 다시 만나게 하는 어쩌면 감동적인 시대에 와있다. 과학과 예술은 인간만이 그 깊이를 더하고 확장할 수 있는 활동이다. 동물은 도구를 사용할 수는 있지만 과학자와 같이 의문을 가지고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진행하고, 수정하고 결론을 도출하지는 못한다. 인공지능 컴퓨터라 해도 과학 논문을 스스로 써내거나 작품을 창조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일부 사람들은 예술은 상상과 창조의 과정이라고만 생각하지만, 예술의 영역에서 작가가 구현하려 하는 작품이나 프로젝트는 기존의 매체나 도구 같은 현실적인 상황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예술가들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찍어내는 활동이 아닌, 사회와 현상에 대한 재해석을 도모하기 위해 아이디어를 세우고, 작업에 필요한 여러 매체들을 조율하고 수정하고 재창조한다. 이런 현실을 이해하고, 아이디어를 가장 효율적으로 시각화할 수 있는 재료와 기법을 찾고, 나아가 더 나은 재료와 기법을 찾기 위해서는 예술가들에게는 과학적인 이성의 힘이 필요하다.

예술을 접하는 방법도 수정이 필요할 때이다. 이전부터 예술은 미술관, 박물관, 갤러리 등의 제한적인 공간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싶었을지 모른다. 예술이 과학이라는 날개를 얻어 그 접점에 오기까지 오랜 세월 많은 법칙이 뒤바뀌고 혼란의 시기를 겪었다.

인간의 창의성이 사라지지 않는 한 과학과 예술은 새로운 창조의 과정을 지속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시대에 살고 있는 이성과 감성을 지닌 산증인이다. 지금 주변에 널린 디지털 문화 속에서 예술적 감성을 충족해 보는 것은 어떨까.
※ 참고문헌

1) 임경순, 과학 기술과 예술의 만남, 한국과학사학회지 제33권 제1호, 2011, 190쪽
2) 아서 밀러, 천재성의 비밀, 과학과 예술에서의 이미지와 천재성, 사인언스북스, 2001
3) Lorraine Daston & Peter Galison, Objectivity, Zone Book, New York, 2007
4) 간단하다. 어떤 작품을 보고 붉은색의 작품이라고 결정내리기 위해, ‘붉다’라는 단어의 습득이 과거에 이루어져야 하고, 어려서부터 듣고 배워온 붉은색이 가지는 상징적 개념들을 통해 작품을 평가하고 비교한다. 그리고 관객이 느끼는 감성과 상상을 결합하여 작품에 대한 이해를 하는 단계로 넘어간다.